6월 휴가_일기1

Roas****
202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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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두 시 반, 와인을 따랐습니다. 유리잔에서 물비린내가 나길래 다른 잔, 다른 잔에 총 세 번을 옮겼다가 어쩔 수 없어 병째 마셨습니다. 이야기 몇마디 나누다 한모금한모금 마실 때마다 기울여진 병이 제자리로 가며 차랄랑 소리를 냈습니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 웃음이 나왔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잠들었다가 다시 깨었지만 여전히 오늘이었습니다. 자정 지나 자길 잘했습니다. 휴가 첫날입니다. 

 

  짐을 챙기기 시작합니다. 별로 많은 것을 챙기진 않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엔 지금보다 짐이 훨씬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마음이 가볍습니다. 혹시 부족할까 챙겨가는 물건은 거의 없습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특히 아이들이 생각처럼 그리 큰 부담이 아닙니다. 함께 생활한 지 이젠 제법 되어 필요한 때에 서로 호흡 맞출 수 있습니다. 각자 적당히 자유롭고 적당히 불편한 질서 속에 순응하며 지냅니다. 

 

  마치 그곳이 고향이라도 되고 회귀본능 있는 사람들처럼 이번에도 우리는 지리산쪽으로 향합니다. 계절마다 갈망하듯 그리운 산이 있습니다. 그중 여름 지리산과 겨울 태백산은 한번도 바뀌지 않습니다. 머리 끝에서 신발 저 안쪽까지 축축하고 질퍽했던, 땅에 닿을 때마다 뿌직 소리를 내던 걸음, 무거웠던 몸. 그리고 그때의 하늘, 구름, 산 안개, 바람, 무섭게 쏟아지던 수류, 먼지 같던 별. 대체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이 서로 얽혀있던 시간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지리산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등산을 하지 않겠지만 이곳 공기와 분위기가 좋아 여기 옵니다. 도착하니 두 시가 조금 지났습니다. 낮 두 시에 우리가 남도에 있다니. 평소엔 제 말을 잘 듣지않던 시간이란 녀석이 오늘 꽤 고분고분하구나 생각했습니다. 은근히 기분 좋았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장을 보러 구례읍내로 갔습니다. 꼴뚜기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횟감이냐고 물으니 꼴뚜기를 아시네, 여가 고향이신가봐요 했습니다. 꼴뚜기는 아침에 들어온거라고도 했습니다. 기대처럼 여기가 고향은 아닌지라 웃음으로 답을 하고 꼴뚜기를 받아 들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꼴뚜기를 고록이라고 하던데 꼴뚜기와 고록이 같은 건지, 비슷하지만 서로 조금 다른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살구는 열 다섯 개 남짓 들었는데 3000원입니다. 욕심이 나서 얼른 담으려고 보니 상처가 꽤 있었습니다. 낙과 같았는데 꽤 맛있어 보여 두 묶음 샀습니다. 가만히 보니 옆에 8개 정도 들어 9000원 하는 묶음도 있었습니다. 고민없이 3000원 살구를 골랐습니다. 먹어보니 맛있는 살구여서 놀랐습니다. 살구들 간에 더 익은 것 덜 익은 것, 큰 것 작은 것, 더 단 것 더 신 것들이 들쑥날쑥 차이가 있긴 했지만 훌륭했습니다. 예약 주문하고 2주 간 기다렸다 먹은 올해 첫살구의 맛은 완전히 잊혀졌습니다. 이게 제일 맛있는 살구다 싶었습니다. 꼴뚜기와 살구 외에도 소금 뿌려둔 삼치, 구례 산수유 맥주, 델라웨어, 상추, 대파, 마늘, 망개떡을 샀습니다.

 

  저녁을 지어 먹고나니 커피 생각이 났습니다. 온두라스 커피를 내렸습니다. 달콤새콤합니다. 잘 익은 포도가 생각 났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디 포렐레>를 한 잔 더 내려 마셨습니다. <디 포렐레>는 송도커피 여름 블렌드 커피 이름입니다. <디 포렐레> 첫모금에 차분하게 유지됐던 저녁이 금세 바뀝니다. 리듬도 조성도 다 바뀌었습니다. 밤인데 생기가 돌아 뭘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몇가지 되지 않아 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내일 계곡에 가서 <디 포렐레> 한 잔 더 내려 마셔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깊은 밤이 되니 모기가 창문 하나마다 적게 잡아도 오십 마리 넘게 붙어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보니 안전한 곳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공간이 더 아늑해집니다. 오늘의 마지막 커피는 달디 단 데보라 게이샤가 될겁니다. 그리곤 더 필요한 것도 할 일도 없는 사람처럼 잠을 자겠습니다. 


  낮에 놀던 새가 밤에 소리를 내는 걸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질서는 어디에서 오는지. 창밖에선 삐이익 삐이익 새가 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