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널블렌드 : 부처님 오신 날

Roas****
202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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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 


카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 우리집 종교는 카톨릭이었다. 그와 달리 할머니는 절에 다니셨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할머리를 잘 따랐는데 해마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할머니와 함께 절에 가길 좋아했다. 지금도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절에 가기를 좋아한다. 


내게 불교는 관점 같은 것이었다.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일들과 마주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 극복할지, 나의 내면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같은. 그것은 종교라기보다 할머니를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는 삶의 태도 같은 것이었다. 


12월 성탄을 기다리던 마음처럼, 

부처님 오신 날을 생각하며 커피를 만들었다. 오래 생각으로만 갖고 있을 뿐 못했던 일을 올해엔 웬일인지 무심히 할 수 있었다. 커피를 내리고 마시며 나의 '괴로움'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마음 속에 작은 연등 하나 밝힐 수 있기를, 날마다 소망한다. 


함께 소개하는 시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낯익은  한용운 시인의 작품이다. 그의 가슴 속 사랑과 괴로움, 그리고 그 가운데 날마다 자신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시에 담긴 것 같아 읽으면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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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님의 침묵],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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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편안히 마실 수 있을 균형 좋은 커피면서도 아름다운 향미가 담겨 있다. 블렌드 재료로 브라질 30%, 에티오피아 58%, 페루 12%를 사용했다. 



사진 : 통도사, 이우준 바리스타